2020/03/21 20:47

죽여주는 여자, 2016, 이재용 감독

+++스포 가득 주의+++

이 영화 개봉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꼭 봐야지 했다. 관심 있는 이슈였으니까. 물론 알고는 있었다. 나의 게으름과 비겁함 때문에 극장엔 가지 않으리란 걸. 코앞이 롯데시네마인데도 좀체 가지 않는 인간이고, 사회 이슈나 역사적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룬 이야기를 보기 힘들어하는 성향으로 이 영화의 성실한 관객이 되지 못하리란 건 정해진 바였다. 얼마 전 유플러스에 새로 들어온 콘텐츠 목록에 이 영화가 있는 줄 알면서도 나는 미루고 미루었다. 그러다 지난 주말엔 마침내 보았다. 믿음이 있었다. 

'윤여정이잖아. 그렇게 힘들지 않을 거야.'

아주 바람직한 믿음이었다. 예상한 만큼 슬프긴 했지만, 우려만큼 불편하지도 심란하지도 않았다. 그건 절대적으로 윤여정이란 배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65세의 소영(윤영정)은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종로 일대에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는 '박카스 할머니'다. 젊어서는 동두천 미군을 대상으로 직업여성의 삶을 살았고, 노년엔 폐지 줍는 삶이 싫어 계속 같은 생계 방식을 이어간다. 

이래 봬도 소영은 '죽여주는 여자'라고 소문이 자자하다. 다른 박카스 할머니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매력과 뛰어난 스킬(?)로 인기 만점이다. 경쟁자들에게 질투와 시기를 사는 건 인지상정이다. 

어느 날이다. 임질로 산부인과에 갔다가 병원 앞에 서 있던 코피노 소년 민호를 데려온다. 아이의 엄마가 경찰에 잡혀 가는 모습을 목격한 것. 이 아이를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 깊은 고민도 없이 무작정 데려온 그녀의 집은, 딱 보기에도 아주 허름한 2층짜리 단독 주택이다. 그나마도 주인이 아니라 1층 방 한 칸을 빌려 사는 처지다. 빈곤의 증거를 숨길 수가 없는 남루한 방에서 아이를 어떻게 보살필지 관객은 걱정이 앞서지만, 소영은 태연하다. 일하러 나갈 때면 트렌스젠더 집주인 티나에게 맡기기도 하고, 또 다른 세입자이자 장애를 가진 피규어 작가 도훈에게 맡기기도 하고, 그도 안 되면 작업 현장에 데려간다. 

소영은 꾸준히 일을 하러 나간다. 귀갓길엔 꼭 민호를 위한 음식을 산다. 소영이 이러는 이유는 마음 둘 곳이 없어서겠지. 민호의 처지가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한 거겠지, 소영이란 인물이 본디 정이 많거나 혹은 정이 필요한 사람이겠지, 여러 생각이 오가는 가운데, 나는 이 영화가 언젠가 소영과 민호가 헤어져야 하는 데서 오는 갈등을 서사의 주축으로 삼을 줄 알았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제목 <죽여주는 여자>를 보는 순간 분명 중의적이리라 생각했는데, 민호가 등장하면서 잊고 만 것이다. 소영은 정말 누군가를 죽인다. 한때 자신의 단골들이었으나 이제는 치매를 앓거나 요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할아버지들이 그 대상이다. 그들이 안락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소영에게 간청한 것이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리는 소영은 결국 그들의 죽음을 어시트하고, 결국 그런 선택이 그녀를 파멸로 몰아간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인 소영은 그것을 파멸이 아니라 자신이 응당 맞이해야 할 삶의 마지막이라는 듯 받아들인다. 민호는 이미 그녀의 엄마 품에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둔 상태다. 

일평생 소외된 채 살아온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누구보다 소외되는 방식으로 삶의 마지막을 맞이했을 때, 관객에게 인생 무상함을 느끼게 해주던 할아버지들은 그나마 좋은 팔자였단 걸 알긴 했을까 싶었다. 그들은 그래도 푼돈으로 소영의 죽여주는 서비스를 받았고, 가족도 외면한 그들을 소영이 진심 어린 마음으로 대해주었고, 마지막엔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게 해주었다. 

소영은 누군가를 붙잡고 신세 한탄을 하지 않았다. 직업여성이라고 상스럽게 굴지도, 죽여주는 여자란 타이틀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은 채 묵묵히 그러면서도 궁지에 몰린 누군가를 기꺼이 도우며 살았다. 그랬기에 소영의 젊은 날은 어땠을까가 궁금해지는 그런 영화였다. 

무엇보다 윤여정의 절제되고 자연스러운 연기가 아니었다면, 관객이 소영의 삶에 대번에 설득되지 못했으리란 확신이 들어, 진심으로 그 배우를 존경하게 되었다. 탑골공원에서 할아버지들 앞을 세련된 옷차림과 도도한 걸음으로 지나가는 소영을 보고 누가 반하지 않고 배길까. 노인, 빈곤 노인, 직업여성, 트렌스젠더, 장애, 코피노 등 '소외'라는 키워드로 묶이는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을 이렇게 한데 모아놓고 관객을 이만큼 자연스럽게 끌어당길 수 있는 영화를 최근에 본 적이 없었다. 

죽여주는 여자 이미지 검색결과

티나, 도훈, 소영, 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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